아펜젤러의 생애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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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nbit 작성일21-10-17 18:49 조회3,8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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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 생애와 활동>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수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교육받았다.
그 후 1878년 펜실베니아주 랭카스터(Lancaster)에 있는 프랭크린ㆍ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입학하고 랭카스터의 감리교도들과 교제하면서 그의 교회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면서 자신의 영적인 불안정 상태를 ‘풍부한 체험(감흥, 감회)’로 극복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할 수 있었다.
뉴저지주 메디슨(Madison)의 드루(Drew)신학교에 입학하고 설교를 하면서 확신과 소명에 대한 복종과 헌신을 각오하면서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 선교를 희망하게 되었다.
1881년 무렵 그의 친구 워즈워즈가 희망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못 가게 되자 워즈워즈 대신 선교의 나라를 일본에서 한반도로 바꾸게 되었다. 한국으로 가는 것이 확정될 무렵, 1884년 12월 17일에 랭카스터의 제일감리교회에서 엘라 닷지(Ella Dadge)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2월 3일 같은 미감리회 선교사인 스크랜트(W.B.Scranton) 부부와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아펜젤러 부부가 한국을 들어가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2월 27일 저녁 일본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요코하마와 도쿄에 머무르면서 한국 선교회의 부감리사로 임명받았고 3월 31일 다시 한국행 정기선[S.Maru호]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미 북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스커더(Scuder), 테일러(Taylor) 등의 선교사 등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드디어 4월 2일 아펜젤러는 부산에 도착, 잠시 하륙하여 그 곳 세관장 로바트(W.N.Lovatt)를 방문하고 마을을 돌아본 후 그 이튿날 다시 출발, 한국의 남해안을 거쳐 4월 5일 부활절 정오에 한강 입구에 들어왔고(제물포에 입항하기 위해 내륙에 가까이 온 것으로 추정) 오후 3시 제물포 앞바다에서 닻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은 전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적인 감정이 가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아직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885년 6월 16일, 헤론(John B.Heron) 부부와 스크랜튼 박사의 모친, 처자와 함께 다시 한국행에 올라 드디어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함께 한달 이상을 제물포에서 머물다가 7월 29일에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1. 초기의 선교활동과 교회 설립
(1) 외국인에 대한 전도활동
아펜젤러가 한국에 도착한 당시에는 한국정부가 외국인에게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외에는 개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국인에게 복음전도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두 번째로 도착한 해 8월과 그 이듬해 4월에 학교일과 함께 외국인에게 성경공부 가르치는 것을 시작하였다.
매주일 한국 주재 일본인들에게 선교하고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모임에 참석하는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 ‘한국에서의 최초의 세례’가 스크랜튼 박사의 딸 마리온(Marion Fitch Scranton)과 자신의 첫 딸인 앨리스(Alice Rebecca), 일본인 하야가와(Hayakawa Tetzya)에게 베풀었다.
(2) 한국인에 대한 전도활동과 교회 설립
아펜젤러는 한국에서의 활동초기였던 1886년 6월 중순까지 선교를 할 수 없었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주한 외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한국인 노춘경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도우면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87년 2월 21일에는 한국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의 교명을 하사받고 이를 자신의 사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으로 간주하고 한국인에게 복음전도 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제자였던 박중상(1887년 7월 24일)과 한용경(1887년 10월 2일)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박중상에게 베푼 세례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 성경사업을 위에 전에 매입하였던 ‘벧엘(Bethel, 하나님의 집)’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서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887년 10월 1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이 날의 예배모임은, 순서의 일부에서 외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의 합작에 의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예배모임은 그의 일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공중예배’인 동시에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것이었다.
1888년 5월 왕명으로 중단할 때까지 주일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일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벧엘교회에서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이 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our liturgy)’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다.
성찬예식을 거행한 감격을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1887년 10월 3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2.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설립과 교육활동
(1) 배재학당의 설립
아펜젤러의 학교에는 1885년 8월부터 4명의 학생이 다녔지만, 본격적으로 학교 사업이 시작된 것은 1886년 4월경부터였다. 이는 아펜젤러가 당시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자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폴크(George Foulk)를 통하여 고종(高宗)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자 고종이 이를 허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887년 2월 21일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 the President of the Foreign Office)을 통해 내개 전달되었다. 그것은 '배재학당 혹은 Hall for Rearing Useful Men'이다.… 오늘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씨(Mr. Kim)가 커다란 한자로 쓰인 학교 이름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는 것이 된다. 이제 비록 국립학교는 아니지만,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1887년 2월 2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배재학당의 설립 당시에는 한국에 영어의 필요성이 제고되고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벼슬을 얻는’ 수단이 되었으며, 학생들은 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게 되고 많은 한국인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 해 입학 신청을 한 것을 두고 보람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에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벽돌로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을 건축하였다. 배재학당은 그 해 6월 24일 방학 때까지 재적 43명에 실제 출석 학생수는 38명, 잠깐 동안만 출석하고 명예롭게 떠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1년간 63명이 등록하였다. 이 중 두 사람, 박중상과 한용경은 회개하고 세례받은 기독교인으로써 선교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실천되고 있는 것이었으며, 복음선교사인 아펜젤러가 강조했던 ‘유용한 인재는 구원받은 인간’이어야 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1888년 교사가 완공되자 구교사를 기숙사로 활용하고, 근로장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산업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1889년 경 거의 틀이 잡혀가게 되었고 학교의 평판은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2) 교육의 이념과 고등교육의 이상
배재학당을 설립한 초기부터 뚜렷한 교육 이념을 제시하며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교육 이념을 부각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조(自助, self-support)적 이념을 부각하여 한국인을 스스로 돕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교육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자주ㆍ자조 정신은 뒷날 반침략 자주독립의 근대정신으로 발전하였다.
두 번째, 그의 자기 사회와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섬기며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 “慾爲大者 當爲人役(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으로 삼고 마태복음 20:27~28의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섬기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자세를, 그의 교육이념으로 승화시켰다.
세 번째, 봉건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개혁적인 교양인의 ‘근대적인 시민’과 ‘지도자’로 학생들을 양성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네 번째, 자기 전통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기반 위에서 서구의 이른바 개화된 문명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수업은 영어를 전달매체로 하고 있지만, 한문 고전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한문고전 과목을 공부해야했다. 이는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배재학당에서 대학과정을 둔 것은 1889년에는 아직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1897년 연례보고서에서 배재대학(Pai Chai College)이라는 말이 시작되어 그 전후한 시기에 대학과정이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학제와 교과과정 등이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신앙적인 바탕 위에서 학문적으로도 훌륭한 교육기관을 수립하여 운영해야겠다는 아펜젤러의 꿈은 원대하였다.
아펜젤러의 활동은 복음전도와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과 출판, 전도문서와 정기간행물 등을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또한 애국ㆍ개화 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할 지도자를 교육을 통하여 양성함과 함께 한국인의 충군애국적이고 자주독립적인 운동을 뒷받침하여 독립협회, <독립신문> 편집 및 발간, 만민공동회 운동을 돕고 관여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아펜젤러의 교육과 선교 등에 대한 원대한 계획은 그가 44세에 돌아가심으로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아펜젤러는 그가 맡은 성경 번역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1902년 6월 11일 목포행 기선[구마가와마루:熊川丸]에 올랐다. 6월 첫 주에 갈 예정이었지만, 일본 노동자들과의 충돌이 있어 일정보다 늦게 출발하였는데, 이날 저녁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가 났던 것이다. 깨어 있던 아펜젤러는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정신여학교장 도티로부터 부탁받은 한 여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구조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원대한 포부를 가진 정열적인 사람이 매우 애석하게 갈 수 있는지 근대 한국 선교와 독립운동에 있어 막대한 손실이요 큰 비극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며 또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 선교사이자 크리스챤 지도자 중에서 죽어서까지 아펜젤러만큼 깨끗한 이름을 남긴 이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고 난 뒤에도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지도자로서 우리 뇌리 속에 인각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혼탁한 한국 기독교계에 무언으로 현대적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이만열,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년
, 「 한국 초대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기독교사상』1985년 4월호, pp.60~75
, 「 아펜젤러의 선교활동」,『빛과소금』1985년 5월호, pp.228~237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니아주 수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교육받았다.
그 후 1878년 펜실베니아주 랭카스터(Lancaster)에 있는 프랭크린ㆍ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입학하고 랭카스터의 감리교도들과 교제하면서 그의 교회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면서 자신의 영적인 불안정 상태를 ‘풍부한 체험(감흥, 감회)’로 극복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할 수 있었다.
뉴저지주 메디슨(Madison)의 드루(Drew)신학교에 입학하고 설교를 하면서 확신과 소명에 대한 복종과 헌신을 각오하면서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 선교를 희망하게 되었다.
1881년 무렵 그의 친구 워즈워즈가 희망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못 가게 되자 워즈워즈 대신 선교의 나라를 일본에서 한반도로 바꾸게 되었다. 한국으로 가는 것이 확정될 무렵, 1884년 12월 17일에 랭카스터의 제일감리교회에서 엘라 닷지(Ella Dadge)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2월 3일 같은 미감리회 선교사인 스크랜트(W.B.Scranton) 부부와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아펜젤러 부부가 한국을 들어가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2월 27일 저녁 일본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요코하마와 도쿄에 머무르면서 한국 선교회의 부감리사로 임명받았고 3월 31일 다시 한국행 정기선[S.Maru호]를 타고 한국으로 향하였다. 이 배에는 미 북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스커더(Scuder), 테일러(Taylor) 등의 선교사 등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드디어 4월 2일 아펜젤러는 부산에 도착, 잠시 하륙하여 그 곳 세관장 로바트(W.N.Lovatt)를 방문하고 마을을 돌아본 후 그 이튿날 다시 출발, 한국의 남해안을 거쳐 4월 5일 부활절 정오에 한강 입구에 들어왔고(제물포에 입항하기 위해 내륙에 가까이 온 것으로 추정) 오후 3시 제물포 앞바다에서 닻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은 전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적인 감정이 가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아직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1885년 6월 16일, 헤론(John B.Heron) 부부와 스크랜튼 박사의 모친, 처자와 함께 다시 한국행에 올라 드디어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함께 한달 이상을 제물포에서 머물다가 7월 29일에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1. 초기의 선교활동과 교회 설립
(1) 외국인에 대한 전도활동
아펜젤러가 한국에 도착한 당시에는 한국정부가 외국인에게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외에는 개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국인에게 복음전도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두 번째로 도착한 해 8월과 그 이듬해 4월에 학교일과 함께 외국인에게 성경공부 가르치는 것을 시작하였다.
매주일 한국 주재 일본인들에게 선교하고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모임에 참석하는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 ‘한국에서의 최초의 세례’가 스크랜튼 박사의 딸 마리온(Marion Fitch Scranton)과 자신의 첫 딸인 앨리스(Alice Rebecca), 일본인 하야가와(Hayakawa Tetzya)에게 베풀었다.
(2) 한국인에 대한 전도활동과 교회 설립
아펜젤러는 한국에서의 활동초기였던 1886년 6월 중순까지 선교를 할 수 없었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주한 외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한국인 노춘경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도우면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87년 2월 21일에는 한국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의 교명을 하사받고 이를 자신의 사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으로 간주하고 한국인에게 복음전도 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제자였던 박중상(1887년 7월 24일)과 한용경(1887년 10월 2일)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박중상에게 베푼 세례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감리교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 성경사업을 위에 전에 매입하였던 ‘벧엘(Bethel, 하나님의 집)’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서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887년 10월 1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이 날의 예배모임은, 순서의 일부에서 외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의 합작에 의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예배모임은 그의 일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공중예배’인 동시에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것이었다.
1888년 5월 왕명으로 중단할 때까지 주일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일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벧엘교회에서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이 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our liturgy)’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다.
성찬예식을 거행한 감격을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1887년 10월 3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2.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설립과 교육활동
(1) 배재학당의 설립
아펜젤러의 학교에는 1885년 8월부터 4명의 학생이 다녔지만, 본격적으로 학교 사업이 시작된 것은 1886년 4월경부터였다. 이는 아펜젤러가 당시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자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폴크(George Foulk)를 통하여 고종(高宗)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자 고종이 이를 허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887년 2월 21일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 the President of the Foreign Office)을 통해 내개 전달되었다. 그것은 '배재학당 혹은 Hall for Rearing Useful Men'이다.… 오늘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씨(Mr. Kim)가 커다란 한자로 쓰인 학교 이름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는 것이 된다. 이제 비록 국립학교는 아니지만,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1887년 2월 2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中)
배재학당의 설립 당시에는 한국에 영어의 필요성이 제고되고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벼슬을 얻는’ 수단이 되었으며, 학생들은 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게 되고 많은 한국인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 해 입학 신청을 한 것을 두고 보람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에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벽돌로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을 건축하였다. 배재학당은 그 해 6월 24일 방학 때까지 재적 43명에 실제 출석 학생수는 38명, 잠깐 동안만 출석하고 명예롭게 떠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1년간 63명이 등록하였다. 이 중 두 사람, 박중상과 한용경은 회개하고 세례받은 기독교인으로써 선교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실천되고 있는 것이었으며, 복음선교사인 아펜젤러가 강조했던 ‘유용한 인재는 구원받은 인간’이어야 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1888년 교사가 완공되자 구교사를 기숙사로 활용하고, 근로장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산업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1889년 경 거의 틀이 잡혀가게 되었고 학교의 평판은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2) 교육의 이념과 고등교육의 이상
배재학당을 설립한 초기부터 뚜렷한 교육 이념을 제시하며 아펜젤러가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교육 이념을 부각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조(自助, self-support)적 이념을 부각하여 한국인을 스스로 돕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교육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자주ㆍ자조 정신은 뒷날 반침략 자주독립의 근대정신으로 발전하였다.
두 번째, 그의 자기 사회와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섬기며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을 “慾爲大者 當爲人役(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으로 삼고 마태복음 20:27~28의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섬기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자세를, 그의 교육이념으로 승화시켰다.
세 번째, 봉건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개혁적인 교양인의 ‘근대적인 시민’과 ‘지도자’로 학생들을 양성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네 번째, 자기 전통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기반 위에서 서구의 이른바 개화된 문명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수업은 영어를 전달매체로 하고 있지만, 한문 고전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한문고전 과목을 공부해야했다. 이는 예비과정(preparatory dept.), 교양과정(academic dept.),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뉘어진 각 과정마다 교과과정에도 반영되어 기본 교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이 개설되었다. 배재학당에서 대학과정을 둔 것은 1889년에는 아직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1897년 연례보고서에서 배재대학(Pai Chai College)이라는 말이 시작되어 그 전후한 시기에 대학과정이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학제와 교과과정 등이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신앙적인 바탕 위에서 학문적으로도 훌륭한 교육기관을 수립하여 운영해야겠다는 아펜젤러의 꿈은 원대하였다.
아펜젤러의 활동은 복음전도와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과 출판, 전도문서와 정기간행물 등을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또한 애국ㆍ개화 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할 지도자를 교육을 통하여 양성함과 함께 한국인의 충군애국적이고 자주독립적인 운동을 뒷받침하여 독립협회, <독립신문> 편집 및 발간, 만민공동회 운동을 돕고 관여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아펜젤러의 교육과 선교 등에 대한 원대한 계획은 그가 44세에 돌아가심으로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아펜젤러는 그가 맡은 성경 번역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1902년 6월 11일 목포행 기선[구마가와마루:熊川丸]에 올랐다. 6월 첫 주에 갈 예정이었지만, 일본 노동자들과의 충돌이 있어 일정보다 늦게 출발하였는데, 이날 저녁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가 났던 것이다. 깨어 있던 아펜젤러는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정신여학교장 도티로부터 부탁받은 한 여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구조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원대한 포부를 가진 정열적인 사람이 매우 애석하게 갈 수 있는지 근대 한국 선교와 독립운동에 있어 막대한 손실이요 큰 비극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며 또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 선교사이자 크리스챤 지도자 중에서 죽어서까지 아펜젤러만큼 깨끗한 이름을 남긴 이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고 난 뒤에도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지도자로서 우리 뇌리 속에 인각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혼탁한 한국 기독교계에 무언으로 현대적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이만열,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년
, 「 한국 초대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기독교사상』1985년 4월호, pp.60~75
, 「 아펜젤러의 선교활동」,『빛과소금』1985년 5월호, pp.228~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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